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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119sh.info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부산행 열차를 보며 충북도경 간부들은 모자를 바로 했다. 잠시 후 열차에서 경석조와 전병수가 내리자 간부들 바다이야기2 은 큰 목소리로 경례를 붙였다. 경례를 받은 경석조가 목례를 하자, 경찰 간부 한 명이 "위원장님, 가방 이리 주십시오"라며 수행비서 역을 자처했다.
경찰과 도청 공무원이 도열
플랫폼을 빠져나와 조치원역 광장으로 나왔을 때다. "위원장님께 경례!", "충성" 구호 소리에 조치원역 광장이 떠나갈 듯했다. 경석조는 두 눈이 릴게임꽁머니 휘둥그레졌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경석조와 전병수는 충북도경에서 준비한 지프차에 타고, 경찰 간부들은 트럭에 타고 청주로 왔다. 충북도청 정문에 내렸을 때는 조치원역 광장보다 더 엄청난 장면이 준비돼 있었다. 이광 도지사를 위시한 전 직원이 도열해 있었다. "원로에 수고가 많습니다"라고 인사한 이광 도지사와 악수를 한 경석조는 도청 국 게임릴사이트 ·과장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날 밤, 두 귀빈을 위한 환영회는 거창하게 이루어졌다. 두 귀빈이 누구길래 충청북도경찰국 간부들과 충북도청 직원들이 도열을 하며 환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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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반민특위 터 반민특위 충북도조사부 터
ⓒ 박만순
경석조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 위원장이었고, 전병수는 조사관이었다. 반민특위의 위상은 대단했다. 위원장은 도지사급이고, 조사관은 도청 국장급의 대우와 보수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북 경찰과 공무원들이 반민특위 책임자와 조사관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경석조와 전병수를 깍듯하게 환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해방 직후 경찰계와 공무원 사회의 고위 관료들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반민족행위)와 관련된 조선총독부 및 산하 기관 간부 출신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구린내 나는 이력 때문에 알아서 긴 것에 불과했다.
1949년 3월 초에 경석조 위원장과 조사관들이 반민특위 충북도조사부 사무실에 짐을 풀었다. 사무실은 일제강점기에 보은자동차부 자리였다. 이후에 조흥은행이 들어섰다가 현재는 신한은행 청주지점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충북조사부는 위원장 산하에 정치 방면의 친일 혐의자를 취급하는 제1조사부, 산업경제 방면의 제2조사부, 일반사회 방면의 제3조사부로 나누어 3명이 기용됐다. 서기와 사무원도 각각 3명씩 기용됐다. 또한 피의자를 체포하고 반민특위 위원장 및 조사관을 경호하는 특경대가 있었다. 특경대는 충북도경에서 파견한 경찰들로 구성됐다.
조직 인선을 완료한 경석조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자신이 임명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의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부적격자
"송필만 의원을 추천합니다."
반민특위 충북 지역 조사위원에 충북 지역의 한 국회의원이 진천군 지역구의 송필만 의원을 추천하자 동의 재청이 이어졌다. 단독 후보에 찬반투표를 하자 12명의 충북 지역 국회의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송필만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제시기에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1924년 하와이로 건너가 이승만이 주도하던 동지회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동했다. 미군정기에는 비상국민회의 교통위원, 애국금헌성회 중앙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장과 한국민주당 중앙상무 집행위원을 지내는 등 친이승만 계열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국회 본회의에서 송필만 의원은 경남의 김재학 의원과 함께 인준이 부결됐다. 송필만의 부결은 소극적인 국회 활동과 친일파 처리에 미온적인 입장 때문이었다. 그는 제헌국회 개원 후부터 반민법이 제정되는 동안 한 번의 발언도 하지 않을 정도로 국회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다음날 충북 지역 국회의원들이 조사위원으로 다시 송필만을 보고하자 논란이 발생했다. 국회의원들은 회기 중에 부결된 사안을 다시 올리지 못하게 규정한 국회법을 위반한 행위로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호선으로 선출된 이가 영동 출신의 박우경 의원이었다. 박우경은 충북 영동 출신으로 일제시기에 군 농회와 축산조합의 기수를 지냈으며, 이후 회사 지배인과 신탄생산판매조합 이사 등을 지냈다. 미군정기에는 충북 영동군청의 관리를 지냈다.
박우경은 반민법 제정 과정에서 발언을 하지 않아 친일파 처벌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없지만, 일제시기 농회 기수를 지낸 경력을 볼 때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허종,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2008).
우여곡절 끝에 선정된 박우경은 충북반민특위 위원장에 이세영을 국회에 추천했다. 이세영은 일제시기에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혁청단의 위원과 청산소비조합의 간부를 지냈으며, 미군정기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하지만 이세영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한 달 동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세영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1949년 2월, 충북 지역 국회의원들은 경석조를 충북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추천했다.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본회의에서 인준되었다. 경석조는 1919년에 조직된 대동단 충북지단장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피체되기도 했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한독당 간부로 활동했다.
조사관에는 부적격자가 있었다. 전병수는 충남 연기에서 3.1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만주로 건너가 친일파가 설립한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전병수는 충북조사부의 활동을 견제할 목적으로 추천돼 기용됐다. 신정호 역시 일제 식민지 후반에 만주국 관리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친일 단체인 만주 공주령 조선인청년회 간부와 협화회 선계청년단 조직위원을 지냈다(허종,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2008)
결론적으로 충북 반민특위 조사부는 출발부터 삐걱거렸으며 일부 부적격자가 조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충북반민특위 활동에 먹구름이 낀 것이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모든 국민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은 친일파 청산에 부정적이었다. 친일파 숙청법이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됐으나 미군정은 인준을 거부했다.
제헌국회에서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청산에 반대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반민특위는 출발부터 불안했다.
활불(活佛)이자 자부(慈父)
▲ 충북반민특위 피의자 현황 충청북도 조사부의 반민 피의자 현황-이강수, 반민특위 연구, 2003
ⓒ 이강수
충북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했던 이들을 체포했다. 이명구, 김원근, 한정석, 박두영, 손재하(영동)였다. 김원근은 청주 지역을 기반으로 1930년 무렵 257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충북산업 취체역, 청주도기조합장 등을 지낸 대지주이자 자본가였으며 도회 의원을 지냈다.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과 국민총력연맹의 간부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이명구는 금융조합 평의원, 청주군 농회 부회장, 도회 의원 등을 지냈으며, 1940년 강제병합 30주년 기념 민간 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한정석은 조선인 경찰로서 가장 높은 계급인 경시까지 승진해 충북경찰부 보안과장과 순사교습소 소장을 지냈으며, 1924년 경찰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청주군 사주면장, 청주읍회 의원, 도회 의원을 지냈으며, 상당금융조합장 등을 지냈다.
중추원 참의들은 아시아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인을 통제하고, 이른바 후방 활동의 제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직된 전시 최대의 통제기구였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간부를 지냈다. 김원근·박두영·한정석·이명구는 이사, 박두영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기에 박두영은 손자를 지원병으로 보냈으며, 이명구도 징병제 실시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김원근과 손재하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사들의 반민족행위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반민특위에 소작인, 고용인(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진정서를 보냈다. 그중 김원근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청주상과대학과 부속 남녀상업 중학교, 대성학원 재단 이사장인 김원근은 교육사업에 전력을 바친 "위대한 인물이요", 배움에 굶주린 우리들의 형제자매를 육영키 위하여 자기 일생에 모은 재산 전부를 통틀어 교육사업을 한 "민족이 낳은 희세(稀世)의 인물"이다. 다만 "일제의 강요"로 부득이 중추원 참의라는 의외의 짐을 부하(負荷)케 된 것이 오직 애통한 일이다. (청주상과대학 일동 진정서, <반민특위 재판기록 3>, 1949)
이러한 진정서를 토대로 경석조 위원장은 중앙반민특위에 김원근의 선처를 요청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소작인들의 진정서와 경석조의 요청문에는 김원근을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의 활불(活佛)이자,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뜻의 자부(慈父)라는 표현이 보인다.
청수정 주민들의 도열
▲ 김원근 충북반민특위 피의자였던 김원근 동상. 청주대학교 내에 설립
ⓒ 박만순
국민총력조선연맹 청주지부장, 청주경방단 부단장을 했던 김갑복은 뼛속 깊이 황국정신으로 무장한 친일파였다. 그는 청주에서 방위대 선전대를 조직해 '간첩·스파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연극을 만들어 충북 도내 각 시·군에 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또 천황의 사진(어진영)을 도청에서 받아서 청수정 사무소(남주동 주민센터의 전신)에 걸어 놓았다. 그 상황을 최동찬은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그걸(어진영을) 도지사실에서 받아 가지고 동사무실까지 가지고 와서, 거기다 봉안을 했는데. 남북한까지 합쳐서, 공공기관이 아닌 일반일선의 동사무실에다 그걸 얻어온 것은 유일하게 청주 남주동에 있던, 청수정이라고 그랴, '스미즈마찌'. 청수정밖에 없었어. ~ 흰 장갑 끼고, 가죽 장화 신고서, 이렇게 받들어 가지고서, 도청에서 청수정까지, 그 양쪽에 청수정에서는 동민들을 나오게 해서 도열을 시켜가지고, 이렇게 봉안을 하고 그랬거든. (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또한 청주신사 신직을 했던 이산연과 헌병보조원이었던 송재욱도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이산연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황민화 완수를 위한 신사제 등을 주관했으며,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인 신직보다 더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재욱은 1919년 청주군 미원면의 3·1운동을 탄압하고 참여자에게 발포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산연은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김원근, 이산연 사례를 통해 충북반민특위 활동이 매우 저조했음을 알 수 있다.
반민특위를 눈엣가시처럼 바라본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에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1949년 6월 6일 서울시경찰국 사복형사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특경대원은 체포됐고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히 위축됐다.
충북경찰국은 "상부의 지시"라며 6월 8일 충북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충북반민특위는 그 시점을 계기로 활동이 위축됐다. 반민특위는 1949년 10월 4일부로 폐지됐다. 친일파 청산의 좌절이었다(이강수, <반민특위 연구>, 2003).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부산행 열차를 보며 충북도경 간부들은 모자를 바로 했다. 잠시 후 열차에서 경석조와 전병수가 내리자 간부들 바다이야기2 은 큰 목소리로 경례를 붙였다. 경례를 받은 경석조가 목례를 하자, 경찰 간부 한 명이 "위원장님, 가방 이리 주십시오"라며 수행비서 역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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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반민특위 터 반민특위 충북도조사부 터
ⓒ 박만순
경석조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 위원장이었고, 전병수는 조사관이었다. 반민특위의 위상은 대단했다. 위원장은 도지사급이고, 조사관은 도청 국장급의 대우와 보수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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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초에 경석조 위원장과 조사관들이 반민특위 충북도조사부 사무실에 짐을 풀었다. 사무실은 일제강점기에 보은자동차부 자리였다. 이후에 조흥은행이 들어섰다가 현재는 신한은행 청주지점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충북조사부는 위원장 산하에 정치 방면의 친일 혐의자를 취급하는 제1조사부, 산업경제 방면의 제2조사부, 일반사회 방면의 제3조사부로 나누어 3명이 기용됐다. 서기와 사무원도 각각 3명씩 기용됐다. 또한 피의자를 체포하고 반민특위 위원장 및 조사관을 경호하는 특경대가 있었다. 특경대는 충북도경에서 파견한 경찰들로 구성됐다.
조직 인선을 완료한 경석조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자신이 임명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의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부적격자
"송필만 의원을 추천합니다."
반민특위 충북 지역 조사위원에 충북 지역의 한 국회의원이 진천군 지역구의 송필만 의원을 추천하자 동의 재청이 이어졌다. 단독 후보에 찬반투표를 하자 12명의 충북 지역 국회의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송필만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제시기에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1924년 하와이로 건너가 이승만이 주도하던 동지회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동했다. 미군정기에는 비상국민회의 교통위원, 애국금헌성회 중앙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장과 한국민주당 중앙상무 집행위원을 지내는 등 친이승만 계열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국회 본회의에서 송필만 의원은 경남의 김재학 의원과 함께 인준이 부결됐다. 송필만의 부결은 소극적인 국회 활동과 친일파 처리에 미온적인 입장 때문이었다. 그는 제헌국회 개원 후부터 반민법이 제정되는 동안 한 번의 발언도 하지 않을 정도로 국회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다음날 충북 지역 국회의원들이 조사위원으로 다시 송필만을 보고하자 논란이 발생했다. 국회의원들은 회기 중에 부결된 사안을 다시 올리지 못하게 규정한 국회법을 위반한 행위로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호선으로 선출된 이가 영동 출신의 박우경 의원이었다. 박우경은 충북 영동 출신으로 일제시기에 군 농회와 축산조합의 기수를 지냈으며, 이후 회사 지배인과 신탄생산판매조합 이사 등을 지냈다. 미군정기에는 충북 영동군청의 관리를 지냈다.
박우경은 반민법 제정 과정에서 발언을 하지 않아 친일파 처벌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없지만, 일제시기 농회 기수를 지낸 경력을 볼 때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허종,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2008).
우여곡절 끝에 선정된 박우경은 충북반민특위 위원장에 이세영을 국회에 추천했다. 이세영은 일제시기에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혁청단의 위원과 청산소비조합의 간부를 지냈으며, 미군정기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하지만 이세영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한 달 동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세영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1949년 2월, 충북 지역 국회의원들은 경석조를 충북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추천했다.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본회의에서 인준되었다. 경석조는 1919년에 조직된 대동단 충북지단장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피체되기도 했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한독당 간부로 활동했다.
조사관에는 부적격자가 있었다. 전병수는 충남 연기에서 3.1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만주로 건너가 친일파가 설립한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전병수는 충북조사부의 활동을 견제할 목적으로 추천돼 기용됐다. 신정호 역시 일제 식민지 후반에 만주국 관리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친일 단체인 만주 공주령 조선인청년회 간부와 협화회 선계청년단 조직위원을 지냈다(허종,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2008)
결론적으로 충북 반민특위 조사부는 출발부터 삐걱거렸으며 일부 부적격자가 조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충북반민특위 활동에 먹구름이 낀 것이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모든 국민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은 친일파 청산에 부정적이었다. 친일파 숙청법이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됐으나 미군정은 인준을 거부했다.
제헌국회에서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청산에 반대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반민특위는 출발부터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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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수
충북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했던 이들을 체포했다. 이명구, 김원근, 한정석, 박두영, 손재하(영동)였다. 김원근은 청주 지역을 기반으로 1930년 무렵 257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충북산업 취체역, 청주도기조합장 등을 지낸 대지주이자 자본가였으며 도회 의원을 지냈다.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과 국민총력연맹의 간부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이명구는 금융조합 평의원, 청주군 농회 부회장, 도회 의원 등을 지냈으며, 1940년 강제병합 30주년 기념 민간 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한정석은 조선인 경찰로서 가장 높은 계급인 경시까지 승진해 충북경찰부 보안과장과 순사교습소 소장을 지냈으며, 1924년 경찰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청주군 사주면장, 청주읍회 의원, 도회 의원을 지냈으며, 상당금융조합장 등을 지냈다.
중추원 참의들은 아시아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인을 통제하고, 이른바 후방 활동의 제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직된 전시 최대의 통제기구였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간부를 지냈다. 김원근·박두영·한정석·이명구는 이사, 박두영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기에 박두영은 손자를 지원병으로 보냈으며, 이명구도 징병제 실시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김원근과 손재하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사들의 반민족행위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반민특위에 소작인, 고용인(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진정서를 보냈다. 그중 김원근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청주상과대학과 부속 남녀상업 중학교, 대성학원 재단 이사장인 김원근은 교육사업에 전력을 바친 "위대한 인물이요", 배움에 굶주린 우리들의 형제자매를 육영키 위하여 자기 일생에 모은 재산 전부를 통틀어 교육사업을 한 "민족이 낳은 희세(稀世)의 인물"이다. 다만 "일제의 강요"로 부득이 중추원 참의라는 의외의 짐을 부하(負荷)케 된 것이 오직 애통한 일이다. (청주상과대학 일동 진정서, <반민특위 재판기록 3>, 1949)
이러한 진정서를 토대로 경석조 위원장은 중앙반민특위에 김원근의 선처를 요청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소작인들의 진정서와 경석조의 요청문에는 김원근을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의 활불(活佛)이자,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뜻의 자부(慈父)라는 표현이 보인다.
청수정 주민들의 도열
▲ 김원근 충북반민특위 피의자였던 김원근 동상. 청주대학교 내에 설립
ⓒ 박만순
국민총력조선연맹 청주지부장, 청주경방단 부단장을 했던 김갑복은 뼛속 깊이 황국정신으로 무장한 친일파였다. 그는 청주에서 방위대 선전대를 조직해 '간첩·스파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연극을 만들어 충북 도내 각 시·군에 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또 천황의 사진(어진영)을 도청에서 받아서 청수정 사무소(남주동 주민센터의 전신)에 걸어 놓았다. 그 상황을 최동찬은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그걸(어진영을) 도지사실에서 받아 가지고 동사무실까지 가지고 와서, 거기다 봉안을 했는데. 남북한까지 합쳐서, 공공기관이 아닌 일반일선의 동사무실에다 그걸 얻어온 것은 유일하게 청주 남주동에 있던, 청수정이라고 그랴, '스미즈마찌'. 청수정밖에 없었어. ~ 흰 장갑 끼고, 가죽 장화 신고서, 이렇게 받들어 가지고서, 도청에서 청수정까지, 그 양쪽에 청수정에서는 동민들을 나오게 해서 도열을 시켜가지고, 이렇게 봉안을 하고 그랬거든. (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또한 청주신사 신직을 했던 이산연과 헌병보조원이었던 송재욱도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이산연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황민화 완수를 위한 신사제 등을 주관했으며,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인 신직보다 더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재욱은 1919년 청주군 미원면의 3·1운동을 탄압하고 참여자에게 발포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산연은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김원근, 이산연 사례를 통해 충북반민특위 활동이 매우 저조했음을 알 수 있다.
반민특위를 눈엣가시처럼 바라본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에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1949년 6월 6일 서울시경찰국 사복형사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특경대원은 체포됐고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히 위축됐다.
충북경찰국은 "상부의 지시"라며 6월 8일 충북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충북반민특위는 그 시점을 계기로 활동이 위축됐다. 반민특위는 1949년 10월 4일부로 폐지됐다. 친일파 청산의 좌절이었다(이강수, <반민특위 연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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