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본] 인테리어뉴스

[노형석의 베네치아 아틀리에] ②'나선' 주제 뱀·지네 모양 조형물우주의 뮤온 입자 검출 장치에수액 전파하는 나무가지 모형도‘만물이 어울려 화통하는 세상’ 기획 의도와는 어울리지 않아준비과정 파행·제도적 허점 노출자르디니 공원에 자리한 한국관 전시장. 처음 천장을 터서 유리판으로 덮고 그 아래 출품작가 김윤철씨가 작업한 뱀 같은 모양의 대형 나선형 구조물이 빛을 내며 꿈틀거린다. 노형석 기자여기는 전시장인가? 기계화학 실험실인가? 백화점 부티크 매장인가? 국가 간 미술 올림픽이란 별명을 지닌 세계 최고 권위의 격년제 국제미술잔치에서 한국 미술의 국가대표들이 나와 꾸린 전시장은 난삽한 물음을 거푸 던지게 했다. 오는 23일(현지시각) 개막을 앞둔 59회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한국 국가관을 수놓은 전시의 주역은 정밀하게 작동하는 기계장치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기계가 빚어내는 미세한 움직임과 광채가 핵심이었다.베네치아 동쪽 자르디니공원의 국가관 구역에 있는 한국관이 외부 미술계 인사와 언론에 사전 공개로 처음 선보인 지난 19일 전시관에서는 전례 없던 풍경을 펼쳐놓았다. 27년 전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했던 한국관의 둥그런 전면 유리창에는 아드리아해의 바다와 맞닿은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특히 막혔던 천장을 뜯어 공간이 환해졌다. 천장을 덮은 투명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은은한 봄 햇살을 받으면서 갖가지 기괴한 모양의 정교한 기계적 장치들이 꿈틀거리며 소리를 내거나 빛을 발산했다. 여느 작품의 미학적 감성과 전혀 다른데다, 이 기계의 작동 방식과 배치된 얼개가 전시장과 실험실, 백화점의 공간적 특징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일단 인식에 혼선을 빚게 했다. 하지만 정렬한 각 기계장치들의 이미지가 강렬해 각 작품들의 기계적 구성과 뿜어내는 빛깔을 계속 주시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 쪽 전문가들과 관객, 취재진이 찾아와 전시장 곳곳에 놓인 기계장치 조형물들을 오랫동안 유심히 주시하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나선’을 주제로 한 한국관 전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실력파 큐레이터로 꼽혀온 이영철 전 계원예술대 교수와 유럽에서 10여년 유학하며 전자음악과 응용과학 등을 공부한 김윤철 작가가 꾸린 것으로, 현지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데는 나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관 내부 곳곳에 배치된 김윤철 작가의 작품들. 꿀렁거리며 유동하는 액상 광물질과 검출되면서 소리를 내는 우주의 뮤온 입자를 보여주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장치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노형석 기자들어가면 가장 큰 홀 공간에서 단박에 시선을 장악하는 기계장치가 있다. 뱀이나 지네 모양으로 나선형의 몸체가 꼬이고 굽이치는 외관을 지닌 <채도 V>란 제목의 거대한 기계 조형물이다.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물고기 비늘처럼 표면을 382개의 특수물질 셀들로 덮었는데, 키네틱 장치에 의한 미세한 변형과 표면 마찰로 셀들에 들어 있는 물질들에 광탄성 변화를 일으켜 수시로 셀의 밝기와 색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옆 옛 화장실로 쓰인 독립공간에는 우주에서 베네치아 현지로 날아오는 뮤온 입자를 검출해 픽픽 소리를 내며 작동하는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푼 태양들>(Argos―the Swollen Suns)이란 탑 모양의 시험관 덩어리 조형물이 서 있다. 현관 옆 유리창 안쪽 공간에는 액상의 특수물질들이 휘젓는 기계장치의 움직임에 따라 춤추듯 율동하는 키네틱 유체설치물 <불꽃>과, 수직축의 튜브와 실린더 사이로 베네치아의 바닷물을 끌어올려 순환시키는 양상을 보여주는 <충동>이 마치 수액을 전파하는 나뭇가지 모형으로 선 채 관객들의 눈길을 붙잡고 있다. 한국관 내부 곳곳에 배치된 김윤철 작가의 작품들. 꿀렁거리며 유동하는 액상 광물질과 검출되면서 소리를 내는 우주의 뮤온 입자를 보여주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장치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노형석 기자김 작가와 이영철 예술감독은 지난달 언론 설명회에서 팬데믹으로 인류가 혼란에 빠진 현재 지구촌 상황과 이를 딛고 나가기 위한 문명의 새로운 움직임을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물질과 세계라는 화두 아래 과학과 시각예술이 융합된 기계장치 작품들의 나선 운동으로 표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존의 수공이나 디지털 아트로 볼 수 없는 세상 만물의 동시적 움직임과 전시관 주변 시공간에 실제로 작용하는 물질의 관계성을 강렬한 기계장치의 율동하는 움직임과 색채들의 변화로 담아냈다는 측면에서 작가가 기울인 노력과 내공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이 전시의 에너지는 딱 거기까지에 머물러 있다. 이 예술감독이 설명회에서 말한 대로 “전시장 건물 자체가 물질이 순환하는 출품작들과 한 몸의 생명체가 되는” 경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품들은 개별적으로 정교한 기계장치임을 드러내는, 계산된 움직임과 색채를 보여줄 뿐이다. 이 감독이 애초 구상했던 16~17세기 이탈리아 수도사이자 예언가였던 캄파넬라가 구상한 이상향의 세계, 물질과 사람, 만물이 어울려 화통하는 세상의 이미지는 전시장에서 구현되지 않았다. 한국관 내부 곳곳에 배치된 김윤철 작가의 작품들. 꿀렁거리며 유동하는 액상 광물질과 검출되면서 소리를 내는 우주의 뮤온 입자를 보여주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장치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노형석 기자이유가 있었다. 절친했던 작가와 기획자 사이에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시 방향과 예산 문제 등을 놓고 극심한 갈등이 생겨 기획자인 이영철 감독은 후반부 작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작가가 자신의 스태프에게 기획자가 비인격적 행위를 했다고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태까지 번지면서 전시가 무산될 위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작가에게 사과하고 전시 공간 연출의 주도권과 예산 집행의 재량권을 사실상 넘겨주면서 갈등을 봉합했다. 한국관 전시에 전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커미셔너(책임자)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박종관 위원장과 국제교류부 간부, 직원들은 기획자와 작가의 극한 대립과 소통 단절로 전시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고 감독선정위원회에 모든 결정을 사실상 떠넘기는 방관적 태도를 보였다. 백화점의 깔끔한 매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작품들을 잇는 맥락보다 개별 작품의 공학적 완성도만 돋보이는 이면에 이런 준비 과정의 파행과 제도적 허점이 숨어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영철 감독은 여전히 문서상으론 전시의 공식 총책임자다. 1995년 이탈리아 당국을 설득해 베네치아 한국관 건립을 성사시킨 거장 백남준의 탄생 90돌을 기리는 행사가 미술계 무관심으로 이번 비엔날레에 마련되지 못한 것도 뼈아픈 부분이다. 알레마니 총감독의 아르세날레 본전시에 출품된 정금형 작가의 작품. 탁자 위에 인체 마네킹과 부속 장치들을 늘어놓았다. 노형석 기자알레마니 총감독의 아르세날레 본전시에 출품된 이미래 작가의 작품.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살덩이나 장기 조각 같은 느낌의 조형물을 철제비계에 올린 얼개다. 노형석 기자한국관과 별개로 알레마니 총감독의 아르세날레 본전시에 출품한 정금형·이미래 작가의 작업들은 미술계의 기대만큼 새로운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마네킹 부품과 신체 덩어리 등을 작업적 화두로 삼은 특유의 개성적 해석을 담은 작품들을 내놓았으나 국내 미술관과 전시장에서 선보였던 근작들과 별다른 차별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 거장 바버라 크루거의 거대한 공간 설치 바로 앞에 돋보이게 배치된 정금형 작가의 마네킹 테이블이나, 상당한 비중의 공간을 할애해 물을 뿜거나 흘러내리는 장기 모양의 설치물을 내세운 이미래 작가의 작품 공간들은 알레마니 총감독이 두 작가에게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다. 전시는 11월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