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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 쟁반에 쏟아붓는 밀번 동전


전날부터 시중에 유통된 따끈따끈한 새 쿼터의 주인공,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화폐 주인공이 된 여성 장애인 인권 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 현대캐피탈 기아차 020)이다. 13일 저녁 미국 워싱턴 DC 국립역사 박물관 내 워너 브러더스 극장에서 ‘역사적 도전:스테이시 박 밀번의 삶과 유산을 기리는 저녁(Historic Change: An Evening Celebrating the Life and Legacy of Stacey Park Milbern)’이라는 이름으로 동전 발행 기념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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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번의 동전은 현대 미국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여성 스무 명을 선정해 쿼터 뒷면 인물로 기념하는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으로 나오는 열아홉번째 동전이다. 최대 7억개까지 발행이 예정돼있으며 시험공고 쿼터의 일반적인 유통기간을 감안하면 앞으로 최소 50년간 미국인들의 일상에서 함께 하게 된다. 앞서 이번 프로그램으로 먼저 나온 쿼터의 주인공들의 면면은 이렇다.



13일 저녁 워싱턴 DC 국립 미국역사 박물관에서 열린 스테이시 박 밀번 쿼터 발행 기념 행사에서 축하공연으로 청년 열린 부채춤./스미스소니언 국립 여성사 박물관 유튜브 캡처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가 중 한 명인 마야 안젤루(1928~2014),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샐리 라이드(1951~2012), 대통령 배우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엘리노어 루스벨트(1884~1962), 걸스카우트 창립자 줄리엣 고든 로 임대차계약서 (1860~1927) ‘살사의 여왕’으로 불렸던 라틴 팝스타 셀리아 크루즈(1925~2003),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인 아이다 웰스(1862~1931), 은하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천체 물리학자 베라 루빈(1928~2016)...



스테이시 박 밀번이 새겨진 쿼터 발행 기념식에서 인사하는 가족들. 왼쪽부터 아버지 조엘 밀번, 어머니 진 밀번, 남동생 데이비드 밀번, 여동생 제시카 밀번./스미스소니언 국립 여성사박물관 유튜브 캡처


밀번은 스무 명 중에서 가장 최근에 세상을 떠났고, 세상에 머문 시간도 가장 짧은 ‘영원한 MZ’세대이다. 주한 미군으로 근무하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이면서 일상 시간의 대부분을 전동 휠체어에서 보낸 장애인이었다. 여러 면에서 다른 쿼터 주인공들과 다른 그답게 이날 행사도 앞서의 쿼터 축하행사와는 다른 모습으로 진행됐다.



13일 열린 스테이시 박 밀번 기념쿼터 발행 행사에서 엘리자베스 지바스 스미스소니언 재단 관람객 접근가능성 담당 국장이 인사하고 있다./스미스소니언 국립여성사박물관 유튜브 캡처


행사자에는 밀번의 모습이 새겨진 큼지막한 동전이 세워졌고, 한지로 만든 부채와 소반, 그리고 팔각쟁반이 놓였다. 한복을 입은 무용수 세 명의 부채춤 공연에 이어 오늘 행사 진행자인 엘리자베스 지바스 스미스소니언협회 관람객 접근성 담당 국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재단 산하 국립 박물관들의 장애인 이동 편의에 대한 정책을 총괄하는 그는 생전의 밀번처럼 전동휠체어에 앉아 이동해 벅찬 표정으로 말했다.



스테이시 박 밀번 기념 쿼터 발행 기념행사에서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장애인 인권운동가 등 참석 인사들이 대담하고 있다./스미스소니언 국립 여성사박물관 유튜브 캡처


“전동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으로서 밀번의 가족들, 미국의 장애인 커뮤니티와 함께 그의 삶을 돌아보고, 그가 새겨진 동전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어 자랑스럽다.” 딸로, 언니로, 누나로, 밀번과 함께 살았던 가족들도 단상에 올라 소감을 말했다. 밀번은 1987년 서울 용산 주한 미군기지121 병원에서 미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 조엘 밀번씨와 한국인 어머니 진 밀번 씨 슬하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진 밀번 제공13일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사박물관에서 열린 스테이시 박 밀번 기념 쿼터 발행 기념행사에 참석한 고인의 가족과 행사 관계자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근육 질환을 앓았다. 부모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한 그는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부모의 격려를 들으며 딸, 언니, 누나로 일상을 살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낙상 사고를 계기로 자신의 몸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권 운동가로 성장하는 씨앗이 됐다.



미 연방 조폐국이 13일 홈페이지 화면에 걸어놓은 스테이시 박 밀번 기념 쿼터./미 연방 조폐국


어머니 진씨는 밀번이 워싱턴 DC는 밀번이 인권운동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밀번이 열 여섯살 때 어머니와 함께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미 청소년 리더십 네트워크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때 장애인 인권운동을 주도했던 주디 휴먼(1947~2023), 미국 연방 정부가 미국 장애인 권리증진법 제정에 공헌한 저스틴 다트(1930~2002)와 만나면서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스테이시 박 밀번을 비롯한 올해 발행됐거나 발행을 앞둔 25센트 등장인물./미국 조폐국


밀번은 코로나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던 2020년 3월 노인층, 장애인, 노숙자들에게 마스크와 긴급 의약품·위생용품을 전달하는 긴급대응팀을 꾸리는 등 이들을 돌보는데 앞장서다 건강이 악화됐고 서른 세번째 생일이었던 그해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진 밀번씨는 “온 가족이 스테이시의 아픈 몸이 낫기를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강인함을 약한 사람들을 위해 쓰도록 하셨다”고 말했다.



스테이시 박 밀번을 기념한 새 25센트 동전의 공식 기념품. 사방을 태극무늬 테두리로 들렀다./미국 조폐국


그러면서 평소 “나는 장애을 가진 사람들이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걸 알도록 하고 싶다”는 밀번의 평소 말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이어 밀번과 함께 활동했던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도 전동휠체어에 타고 행사장을 찾아 무대에 오르거나 혹은 화상으로 연결해 그를 추억했다.



2022년 스테이시 박 밀번의 생일이자 기일을 맞아 구글이 특별히 제작한 로고./구글 두들 아카이브


‘아메리카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으로 나오는 새로운 동전 발행 기념식 때마다 해당 인물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동전을 들이붓는 행사를 진행해왔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이었고, 서울 거리 풍경 보는 걸 좋아했고, 천상 ‘된장 입맛’이었던 생전 모습을 고려해 소반에 팔각쟁반을 올려 저녁상차림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에서 동전이 또르르르 쏴아아 쏟아졌다.